중국은 예로부터 서예를 '書法'이라고 불렀다. 이에 비해 일본은 서예를 '書道'라고 부르며 최근에는 ‘전위서예’라는 이름으로 발전시켰다.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붓글씨를 '書藝'라고 부르는데, 이를 최초로 명명한 분은 전남 진도 출신의 소전(素荃) 손재형 선생이다.
손재형 선생은 당시 국회 문공위원을 하면서 우리의 붓글씨를 예로부터 사람 보는 기준으로 삼았던 六藝 중에서 찾았던 것이다.
곧 《周禮》에서 이르는 六藝는 여섯 가지 기예를 가리키는 말로서, 禮, 樂, 射, 御, 書, 數이며, 이는 각각 예학(예의범절), 악학(음악), 궁시(활쏘기), 마술(말타기 또는 마차몰기), 서예(붓글씨), 산학(수학)에 해당한다.
주자학을 섬겼던 우리나라에서는 며느리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거나, 심지어 농사를 지을 때도 12달을 안배함과 동시에 육예를 고려해서 진행하였다.
이처럼 우리만의 서예를 명명한 소전 선생은 사실 추사 다음을 잇는 한국 서단의 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림에 있어서도 동양화라고 부르던 것을 '한국화'라는 이름으로 명명하여 주체의식을 갖도록 하였다.
'四君子' 역시 서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수묵화란 물 수(水), 먹 묵(墨)으로서 사군자 등을 칠 때 물로 조절하는 그림을 말한다. 따라서 채색화는 수묵화의 범주에 넣지 않는다.
또한 서예는 일필휘호가 원칙으로 먹을 묻혀서 한 번에 치는 것을 말한다. 만약 한 번에 쓰지 못하고 다시 잇대어 쓰거나 덧칠한 글씨는 ‘개칠’이라고 하여 죽은 글씨로 본다.
따라서 선생은 서예가로서 무엇보다도 '德高思想'을 교훈처럼 새기면서 살고 있다.
‘德高似山可延年 心寬如海能增壽’ 곧 ‘덕이산처럼 높으면 나이를 늘리고 마음이 바다처럼 너그러우면 능히 생명을 늘린다’는 말처럼 덕과 너그러움을 일상에서 실천하면서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
평소 서예에 대하여 과문하였던 필자에게 유창하면서도 알기 쉬운 강의 한마당이 끝난 다음에야 선생의 살아온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향을 잊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살아온 내력을 담담히 들려주었다.
임현기 선생은 1941년 3월 21일에 무안군 청계면 상마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니까 올해 78세이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듯이 집안이 가난하였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한문 서당을 하는 훈장이었으므로 노동력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청계초등학교 13회를 졸업하고 대구에 있던 외가 친척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흔히 말하듯이 잘사는 외가 덕을 보았던 셈이다.
군에 입대 후 영천에 있는 육군정보학교 피교육생으로 있으면서 공휴일이면 대구에 있는 외가 친척집에서 경영하는 중소기업 회사 사장과 자주 만났던 인연으로 제대 후 취직이 되어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향학열이 높은 선생은 회사 사장의 후원으로 영남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경영학을 선택한 만큼 그렇게 순탄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상경 후 1972년 고려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을 수료하고 2000년에는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문화 최고위 과정을 수료하는 등 만학도로서 학문의 길을 계속 하였기에 2005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서예문화 최고위과정 초빙교수로 발탁되어 10여 년간 지도교수로서 후배양성에 정열을 쏟았다 한다.
그런데 서른 살 중반을 넘어가던 무렵에 끝없이 옭아매는 직장생활에 회의가 들었다. 우선 살기위해 직장생활을 하지만 결국 급료를 받으면서 남의 밑에 있는 것은 그의 요구대로 사는 일이었다.
“자유가 없고 내 인생이 없는 것이지 않은가!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너무 허망할 듯 싶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내면에서 들려오는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어렸을 때 서당 훈장을 하면서 한학을 하여 가난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절대 안하려고 했던 붓을 다시 잡게 되었다.
옛말에 사람을 평가할 때는 '身言書判'을 기준으로 삼는다고하였다.
곧 몸가짐과 말솜씨 그리고 글 솜씨와 판단력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는것을 말한 것일 터이다.
무안문화원측의 소개를 받아서 사전에 일정부분의 조사를 했지만 처음 만나는 성곡 임현기(惺谷 林炫圻)선생은 일단 훤칠한 키에 낮고 걸걸하면서도 호방한 음성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이미 유명한 서예가였기 때문에 글 솜씨까지 갖추고 있음은 물론일 것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예술가로서의 시각과 또한 이를 통해서 형성되었을 삶의 행로에 대한 궁금증이컸다.
이는 대성한 선배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형식과 내용이 궁금했음은 물론이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로서의 삶의 여정에는 고난과 성취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하는 드라마이기 마련이다.
서예가인 성곡 임현기 선생을 만난 것은 <제15회 한중일 서예대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예술의전당 전시장에서였다. 서예계에서는 내노라 하는 한국작가 65명, 일본작가 31명, 중국작가 45명을 초대하여 대규모 동양서예전시회를 진행하고있는 현장이었다.
동양서예협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전시회를 주관하고 있는 임현기 선생은 우선 서예에 대한 필자의 궁금증을 즉석에서 스스럼없이 풀어주었다.
우리들은 흔히 입신출세 할수 있는 관문을 ‘등용문(登龍門)’이라고 한다.
즉 사람이 출세하면 ‘개천에서 용 났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등용문을 통과했다고 한다. 특히 문학 장르에서는 신인의 등장을 두고 등단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등용문이라는 고사의 유래는 이렇다. 중국의 큰 강 황하가 산시성에 이르면 3단계 폭포를 이루는 곳이 있는데 이를 용문이라 불렀다. 잉어가 그 용문을 올라가면 용이 된다는 설화이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바로 ‘등용문’이다. 따라서 용이 된 것은 처음에 용이 아니라 잉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등용문을 거쳐서 잉어가 용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 설화에서도 등용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실패하면 이무기가 된다고한다.
그런 점에서 임현기 선생의 서예가를 향한 올곧은 정진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의 기간과 공부를 통해서야 그는 스스로 자신이 등용문을 통과했었던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처음 서예를 시작할때 스승이 웃으면서 한 십년 정도 해야 된다고 했었는데, 정확히 그가 45세 되던 해에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작가가 되면서 소박하나마 서예가의 길에 접어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앞에서 간략히 설명하기는 했지만 사실 다른 데를 보지 않고 서예에만 집중하여 이룬 성과였다. 그렇잖아도 주변에서 돈이 잘되지않는 서예를 멀리하고 ‘그림값이 되는 동양화로 바꾸라’는 권유가 많았고, 실제로 많은 서예가들이 그쪽으로 옮겨갔다. 누구에게나 호구지책은 삶의 조건이었기 때문이라서 탓할 일은 못되었다.
하지만 성곡 선생은 서예에 대한 굳은 결의와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에 서예가로서의 길만 묵묵히 갔다. 또한 글을 중심으로하는 서예작품에 사군자 등의 그림을 그리는 서화 역시 채색은 아니다 싶어서 수묵화만 고집했다.
물론 이러한 집념은 사실 서예에 대한 지향 점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음 자체가 닿지 않아서 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뒷날에 보면 서예가로서의 일정한 성공은 이러한 집념 때문이었다고 했다.
뒷날 생각해보니 그의 내부에는 이미 서예가로서의 핏줄 곧 원형질이 내재되어 있었다고 회고한다. 한학자였던 외할아버지 오창 선생으로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5, 6살 때에 한학과 서예를 배웠다.
또한 아들 오우영 씨는 청계면 초대면장을 지냈던 분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배운 한문 실력과 서예 솜씨는 필력이 좋아서 서당의 학동들에게 읽힐 책을 직접 써서 만들어 줄 정도 였다.
그리하여 막상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배울 것이 별로 없었다 한다.
1975년 서예대가였던 원곡 김기승 선생님을 찾아가서 과연 제가 35세의 나이에 서예를 시작해도 되겠는가를 물었다.
원곡 선생은 자신의 경우에는 40세의 나이에 처음 서예를 시작했다고 하면서 서예가로서의 입문을 흔쾌히 수락했다.
원래 원곡 선생은 청년시절에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만주로 가서 안창호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리하여 해방 후 귀국하여 소전 손재형 선생을 만나 비슷한 연배 임에도 스승으로 모시고 전문적으로 서예를 배웠다.
그때가 마흔 살 이었기 때문에 35세의 나이는 아직 이른 편이라고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서예를 배우기 시작하자 아내는 물론 처갓집의 반대는 극심했다. 어쩔 수 없이 선생은 당분간 집을 나와서 여관방에서 혼자 글씨를 썼다.
이와 관련하여 웃기 힘든 에피소드도 있다. 그때 집에서는 가출 신고를 한 상태로 선생의 소재 자체를 몰랐다. 그런데 선생이 국전에 출전해서 입상을 한 소식이 실린 신문기사를 본 친구들이 집에 축하 전화를 해서야 가족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선생의 생사를 확인 했다고 한다.
그처럼,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 이겠지만 특히 서예는 일단의 결단력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놀 것 놀고, 먹을 것 다 먹으면서는 서예가의 길을 제대로 갈 수가 없다.
물론 누구에게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돈이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삶에 대한 가치를 중요시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수많은 전시회와 이를 종합하는 개인전 59세(원곡서예상 수상 전 세종문화회관) 회갑전61세 고희전 70세(한일 서예양인전 한국대표 : 林炫圻 일본대표 : 恩地春洋)을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개최하는 등 나름대로 서예계에서일가를 이루었음에도, 고향인 전라도나 무안에서는 잘 알지 못한다. 물론 자신을 알리려고 나대는 일은 서예가에게 있어서는 품격을 해하는 일이다.
전라도의 광주광역시에서 서예경연대회같은 행사를 하는 경우에 초대 심사위원으로 초청 받아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전라도 무안 출신인줄 모르고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서 내가 서울에서 활동하는 작가로서의 지분을 통해서 선정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이 내가 일찍 고향을 떠난 덕분에 서예가로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고향인 무안에서는 내가 쓴 글씨들이 비교적 많이 있다.
예전에 문인으로 활동했던 이재현 군수와 박석무 국회의원의 소개로 무안 향우지에 ‘무안군 사람들 합심하라.’라는 휘호 務安合心과 승달문화예술회관의 앞에 있는 석비(石碑) 글씨도 썼다. 또한 무안 군립 국악원에있는 한국 최초의 창극을 만들었던 강용환 강태홍 강남중 예적비에도 글씨를썼다.
현재 목포 예술고등학교 앞에 있는 무안노인회에서 세운 임석준 송덕비의 글씨는 물론 박석무 선생이 글을 짓고 내가 글씨를 쓴 무안 박씨 시조비석과 愛閑亭 현판이 무안 고절리에 있기도 하다.
하지만 어떠한 예술가도 또한 일상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거나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특히 가정을 꾸리는 예술가는 더욱 그렇다. 또한 본능적인 욕망이 주는 갖가지 일상적인 습관과 유혹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 역시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40세 무렵에 힘든 시기도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보통의 남성들은 물론 특히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선생 역시 담배를 많이 피는 골초였다. 그런데 어느 날 국전대회에 출품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던 서예작품에담뱃불이 떨어져서 작품을 버렸다. 그래서 그때 담배냐 작품이냐를 고민하다가, 굳은 결심을 통해 담배를 끊은 이후로 지금까지 담배를 전혀 피지 않고 있다.
사실 이처럼 어떻게보면 서예 공부를 하면서 독공을 펼쳤지만 또한 서예를 통해서 자신의 기질과 삶이라는 일상생활을 형성시키고 유지해왔다. 예를 들어 40대 초반까지 아내에게 운전을 맡기다가 40대에 이르러서야 운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 운전면허를 따려고 하는데 쉬울 리가 없었다. 특히 정적인 서예공부를하다 보니 아무래도 동적이고 외형적 기질이 필요한 기계나 엔진을 다루는 솜씨가 많이 밀렸다. 운전면허시험에 네 번이나 떨어졌지만 끝끝내 다시 도전해서 결국 면허를 땄다. 일상생활 역시 서예를 익히는 과정에서 처럼 나름대로의 독한 실천하고 인내를 실현한 셈이다.
슬하에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아이들은 아내 덕택에 무난한 가정에서 잘 성장하여 모두들 출가를 해서 잘 살고 있다. 그렇듯이 서예공부를 정진해서 어느 정도 서예가로서 성공할 시기는 물론 현재까지도 사실 공무원 생활을 해온 아내 덕분에 가정 경제가 무난하게 유지되어 왔다. 그런 점에서 아내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한중일 동양서예전시회는 벌써 15년째 진행하고 있으며 광주 전남 지역에서는 16명의 서예작가를 초청해서 참가하고 있다. 또한 선생은 내년이면 팔순(八旬)에 이르러 진행할 산수(傘壽)전시회를 준비하고있다.
‘예술의전당’의 대관이 쉽지 않기 때문에 1년 전인 얼마 전에 미리 대관을 받아 두었다. 여기에서 선생이 걸어온 평생의 서예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서예전시회와 서예 서집(書集)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다.
또한 현재 고향인 전라남도에서는 수묵화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이와 같은 국제 서예행사가 지역에서 열리는것은 의미가 깊다고 생각하며, 선생이 십 수 년째 진행하고 있는 한중일 동양서예전시회 역시 같은 취지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국제 서예행사가 고향인 전라도에서 진행된다면 이왕이면 동향 출신의 서예가들을 다양하게 참여시키면 좋겠다. 서예 자체가 학문과 예의를 중시 여기는 예술인지라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숨어있는 서예가들이 많지만, 원래가 문향인 전라도 출신 서예가들은 전국에 무수하게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한 무안에서도 예전에는 매년 서예 및 휘호대회는 물론 서예전시회 등을 할 때 함께할 기회가 있었는데, 현재는 아무런 연계할 지점이 없어서 서운하다면서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들이 진행되어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전언을 전했다.
물론 이를 통해서 그동안 임현기 선생이 이룩한 여러 가지 서예활동을 담아낼 수 있는 기념관 같은 공적 공간이 마련된다면 적극적으로 함께할 의사가 있음도 피력했다.
무안향교 등을 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서예인들이 많은 무안 지역의 문화 환경에서 성곡 임현기 선생과 연계된 문화 콘텐츠로의 연계는 좋은 문화기반을 마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작품은 관동별곡 24곡병(국립극장), 임진왜란때 일본에 끌려갔던 일본 도자기 시조 李參平공기념비(유성), 단원 김홍도 그림비(국립현대미술관), 3.1운동 독립문 제작처 기념비(조계사後), 沈熏 문학기념비(안산성포공원), 橫步 廉想涉 문학시비(세종로교보문고앞), 大寂光殿과柱聯(양구선원)외 많은 작품이 있다.
또한 선생은 “앞으로 서예인구는 더욱 늘어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일차적으로는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밥을 먹으면서 살만 하면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문화욕구가 일어나면서 또한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한다. 또한 먹의 향기 곧 '墨香' 자체가 인간의 건강에 좋아서 서예를 하면 사람의 잔병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로 인터뷰를 마쳤다.
임현기 선생의 마중을 받으면서 예술의전당을 나서는데 마치 길고긴 예술드라마 한 편을 감상하고 나서는것 같기도 했고, 예술의 향기와 품격 그리고 묵직하면서도 날렵한 서예 글씨로부터 풍겨지는 묵향에 젖었다가 벗어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임현기 선생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송강 정철의 시조를 서예작품으로 만들어서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전시회를 개최했다는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다. 조선시대 호남문학의 두 줄기인 시조와 가사 중에서 특히 송강 정철의 시조는 전라도 문화와 정서를 누구보다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 이었다.
그런데 이에 더하여 한중일 전시회를 하는 전시회장 전면에<송강문화재단 이사장 정운찬>의 화환이 보여서 이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선생은 다시 굵은 목소리로 두꺼운 도록을 펼쳐서 넘기면서 일일이 설명을 했다.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충청북도 진천에 송강의 사당을 세울 때 송강의 문학작품을 서예글씨로 쓰는 기회를 가지면서 였다. 이를 인연으로 전 국무총리이자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냈던 송강문화재단 정운찬 대표를 만났다.
그리하여 국립극장에서 송강의 작품인 관동별곡을 공연작품으로 만들 때 무대에 올릴 서예글씨를 썼고, 뒷날 송강 정철이 태어난 서울 종로구 청운초등학교 자리에 기념비를 건립할 때에도 선생의 글씨가 새겨졌다.
또한 아름다운 한국의 대표문학인 송강 정철의 문학작품을 세계에 알리자는 취지로 송강의 작품을 서예글씨로 써서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현재까지도 해년마다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를 돌면서 송강 작품을 가지고 전시회를 진행하고 있다.
송강의 시조와 선생의 서예작품을 알리는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한국의 문화를 전파하는 의미 깊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또한 매년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는 송강 정철 기념행사가 개최되고 있으며 임현기 선생이 쓴 송강의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상설 전시 되고 있다.
선생은현재 송강문화재단의 예술위원장으로 활동하고있다.
글쓴이: 시인 박관서
조선대대학원과 목포대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과정 수료.
1996년 계간 『삶, 사회 그리고 문학』 신인 추천.
1997년 제7회 윤상원 문학상 수상.
2014년 도라지 해외 문학상 수상.
시집 『철도원 일기』외 현장 연구서 『각설이 품바 마을 일로 지역 주민 생애사』 간행.
현재 각설이 품바 보존회 이사, 다도해 문화예술 교육원 원장.
광주 전남작가 회의 회장, 무안 청계의 월선리 예술인 마을 거주하면서 집필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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